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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한도(歲寒圖)
    아버지 2020. 10. 22. 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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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한도(歲寒圖)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

     

    오늘은 세한도 복사본 하나를 구입해서 표구하여 집에 걸었다. 

    세한도는 추사 김정희 선생이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할때인 1843년 제자인 우선 이상적 선생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그려 준 것인데 네 그루의 송백이 서 있고 적거지에 눈 덮인 오두막집을 그려 세한도라 제하고 완당이 우선에 시상한다고 자서(自署)한 뒤 제발(題跋)로 우선에게 고마움의 표시와 자신의 심정을 일문으로 정서한 작품이다.

     이상적 선생은 이 세한도를 받고 감읍하며 1844년 동지사 이하응을 따라 청나라 북경에 갈 때 행장에 이 세한도를 가지고 가서 다음 해 1월에 친하게 알고 있던 청나라 학자 오찬(吳贊)의 초대를 받아가서 이 자리에 모인 내로라하는 당대의 청나라 학자들에게 본인의 원운과 함께(이 원운은 불행히 이 세한도에 남아 있지 않고 은송당집에만 남아 있다고 한다) 16인의 찬(贊)을 받아 왔다고 한다.

     그리하여 가보로 보존 되었으나 이상적 선생이 가신 뒤 이상적 선생에겐 자손이 없고 이 세한도 또한 알 수 없는 경로로 전전하게 됐다는데 일설에는 김병선에게 넘어갔다 그 아들 김학준이 소장하게 되었었다고도 하며, 청나라 학자들의 찬발 속에 김학준의 찬발이 끼어있다고 한다. 

    또는 민규식이 소장했었다는 소문도 있으나 어쨌든 일본의 완당 연구가 등총(藤塚) 에게 넘어갔던것을 서예가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 씨의 노력으로 거금에 찾아와 뒤에 오세창 선생 이시영 선생, 정인보 선생 등의 추찬을 붙여 애완하다가 소전이 민의원에 출마키위해 돈이 부족하여 동대문 거상 이근태씨에게 거금으로 잡혔다가 되찾지 못하고 문화재 모집가 손세기씨에게 넘겨져 소장되어, 지금은 그 아들 손창근씨가 소장 중이라고 하며 많은 설화들이 난무한다.

     이 세한도는 1974년 12월 국보 제180호로 지정되어 1975년 , 국립 박물관에 한국 예술 2000년 전에 출품되었던 작품
    으로 복사판본이 시중에 나왔던 것으로 복사본은 우리가 흔히 대할 수 있게 됐다.


     세한이란 말은 논어 제9편 자한(子罕) 나오는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也) 라는 말에서 온 말로
    추운 해가 지난 연후에야 송백이 늦게 시듦을 안다는 뜻이다.

    그래서 추사 선생이 이 세한도에 정서한 글에 보면 이 말을 인용하여, 아무 힘없이 바다 밖에서 귀양살이하는 초췌한 늙
    은이를 섬기는 이상적에게 권력과 이득만을 쫓는 세태에서 이 어려운 나에게 변함없는 존경과 애정을 받치니 날이 추어
    봐야 송백이 뒤에 시듦을 알 듯 그대야 말로 송백과 같다는 뜻으로 칭찬한 것이다.

    그 글의 일부를 옮기면 송백은 사계절을 일관하여 시들지 않으니 날이 추운 이전에도 하나의 송백이요 날이 추운 이후
    에도 하나의 송백이나 성인이 특별히 날이 추운 이후를 칭찬했으니 지금 그대는 나에게, 내가 좋은 위치에 있으며 지금
    같이 되기 이전에도 더 한게 없고 지금과 같이 된 이후에도 덜함이 없으니 예전의 그대야 말할 것 없지만 지금의 그대는
    역시 성인의 칭찬을 받을 만하다. 

    성인을 특별히 지칭하는 것은 한 갖 잎이 뒤에 시드는 곧은 절조와 굳은 절개뿐만 아니라 또한 날이 추운 때에, 간절한 느낌이 발하는 바가 있어서 이다 하고, 자기의 소회를 써넣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이 그렇게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변함없는 애정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 마음의 감동이 어떠하였겠
    는가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모든 사람은 자기에게 이익이 있을 듯하면 모여들지만 아무 이익이 없을 듯하거나 자칫하여 손해를 볼 것 같으면 친했던 사람들도 떨어져 나가는 것이 세태이다.

     그러하니 그런 경우에도 변함없이 후의의 관계를 유지하는 자야 말로 추운 겨울을 맞아도 변치 않는 송백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비단 이런 경우뿐만 아니라 어려움이 지나 본 뒤에야 그 진가를 아는 경우는 사람뿐만 아니라 천하 만물이 다 그러한 것 같다. 

    나라가 위태로워진 연후에야 충신과 간신을 알 수 있고, 매우 큰 일을 당해본 연후에야 군자와 소인의 차이가 드러난다. 

    절박한 어려움을 겪어봐야 좋은 남편과 좋은 아내가 판명되고, 불 속에 들어가 봐야 금강석이 단단함을 알게 되며 흙속에 묻혀봐야 녹슬지 않는 금을 알게 된다.

     강풍이 지나 봐야 허술한 집과 견고한 집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며 뿌리 깊은 나무와 그렇지 못한 나무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나도 그 송백과 같이 살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으나 세한에 송백과 같음을 존경하고 그렇게 살아보려고 노력한다.

    그리하여 나의 아호를 한백(寒栢)이라 한 것도 그런 연유에서이다.

    세한도는 흰 백지위에 붓을 들어 불과 몇 줄의 줄로 그림을 그리고 점 몇 개를 찍은, 극히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절제
    된 그림이다. 

    그러나 그 구도와 그림 전체의 균형감각이 완전하고 보는 자로 하여금 눈 덮인 쓸쓸한 토담집에 몇 그루의
    송백이 서 있는 모습에 자기도 몰래 빨려 들어가는 매우 정제된 그림이다. 

    거기에다 구구절절한 글까지 겹 드렸으니 금상첨화라 할까 글과 그림 글씨가 어우러진 글자 그대로 삼합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좋은 뜻과 함께 기품 있고 수준 높은 그림과 천하명필의 글씨와 명문을 함께 볼 수 있으니 비록 복사본이면
    어떠하랴?

    내가 보고 좋으면 그만이지 이 목숨 다 할 때까지 아침저녁으로 보며 즐기고 마음을 다 잡으련다.

     - 끝으로 우리의 많은 문화재 미술품들이 지난날 우리의
    국망에 의한 수탈과 국란으로 또는 우리의 의식 부족으로 너
    무 많이 다른 나라로 유출됐는데 뜻있는 분들에 의하여 다소
    가 우리 품으로 돌아오기도 했으나 아직도 너무나 많은 문화
    재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개인적 사욕을 위하여 몰래 유출되고 있음을 완전히 막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면 분개스럽고 부끄러운 일이다.

     세한도 또한 일본에서 다행히 돌아올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할 뿐이다.

     세한도는 예술적인 그림으로서 뿐만 아니라 탄생된 경위와 그 의미가 우리에게 너무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그 정신과 교훈이 더욱 절실한 시대이기에 세상에 더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다.

    이상적(李尙迪 :1804 ~ 1889) : 호가 우선 (藕船), 온양군수, 지중추부
    사 글씨를 잘 쓰고, 특히 시에 뛰어났다. 청나라에 12회나 왕래하며 명
    사들과 교유, 그 시집이 청나라에서 먼저 발간되었고, 헌종임금이 그 시
    를 애송했으므로 문집 이름을 은송당집(恩誦堂集) 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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