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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구분 지어지는 것은 기독교 성경의 창세기에 천지창조 하나님이 취미로 아담과 하와를 만들었다는 상징적 비유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데서 접근해야 할 문제인 것 같다.
그런데 지나 서미나라 박사가 에드가 케이시의 리딩에 의하면 말한 대령과 불교에서 말하는 깨닫기 전의 중생이 사후(死後)에 중유상태로 머문다는 것과의 관계 역시 비슷한 점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에드가 케이시의 리딩이나 불교의 윤회설 모두 그 영혼이나 아뢰야식은 어떻게 전생(轉生)되도록 윤회의 길로 최초에 들어섰느냐 하는 점에는 많은 의문점을 갖고 있지만 두 설(說) 모두 윤회전생(輪回轉生)이 카르마와 인연에 의한 결과하는 데는 동일하다.
또 한 가지 불교에서는 단상이견이라는 것이 있다.
즉 세상의 모든 것은 내가 죽으면 그것으로 끝난다고 생각하는 견해를 단견이라 하고 세상의 모든 것은 인연과 업에 의하여 반드시 운명적으로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는 견해를 상견이라고 하여 이 두 견해를 모두 이견으로 배격하는 것이다.
이것은 에드가 케이시의 라이프 리딩에 나타나는 수많은 사례와도 완전 일치 한다.
그리고 불교 경전 중의 하나인 밀린다왕문경에 밀린다왕이 나가세나에게 묻기를 알면서 나쁜 짓 하는 사람과 모르고 하는 사람 중 누가 더 큰 화를 입는가라는 물음에 모르고 나쁜 짓 하는 사람이 더 화를 입는다고 말했다.
보통의 우리 사회 일반상식과는 정면 배치되는 말이다.
이것은 에드가 케이시의 라이프 리딩 중에 전 전생에 그 민족의 풍습 때문에 일어난 일 다시 말하면 어느 야만종족 중에 적의 눈을 지지는 풍습때문에 그것을 직업으로 가졌었던 자의 카르마가 금생에 장님으로 나타났다는 얘기와 상통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것이 당시의 그곳에 당연한 것으로 법과 사회정의와 일반 도덕 기준에 정당하다고 믿었던 것도 그것이 우주 법칙의 원리와 꼭 일치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죄를 지으면서도 죄인 줄 모르고 짓는 죄는 정도가 더 심하기 때문에 죄가 더 깊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불가피한 상황에 한 일 등도 있을 수 있고 예를 들자면 비록 남의 지시를 받아 어쩔 수 없이 한 일도 독한 마음을 먹어야 하는 일이면 그것이 그 사회정의에 정당하거나 칭찬받을 일이라도 그 독한 마음은 독한 마음을 갖는 아뢰야식이 되든지 카르마 즉 업이 만들어질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원수는 원수로 갚으면 수 만겁이 지나도 풀리지 않고 악순환만을 이루므로 오직 용서로서만이 풀린다고 했다.
비록 사회 정의상 옳다고 해도 자기가 갖는 원한이나 미움은 나쁜 업을 만들고 나쁜 인연이 나쁜 인연을 좋은 인연이 좋은 인연을 만들고 자기가 닦은 심성이나 기술 등도 그 성질만은 아뢰야식으로 합쳐져 새로운 성질의 아뢰야식으로 전전한다는 등의 주장들은 모든 면에서 에드가 케이시의 리딩과 완전 일치한다.
이것을 우연의 일치라고만 하기에는 너무 경이롭다.
그동안 동양권에서는 윤회와 관련된 설화가 너무 많고 일반화됐었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기독교 문화권에 영향으로 이를 부정해 왔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최면술에 의한 전생추적(이것은 실질적 전생재현이 아니라는 의학적 주장이 강해 아직은 꼭 믿을 수 없다.) 또 에드가 케이시에 투시력에 의한 리딩 자료 기타 여러 사람들의 불가사의한 경험과 일 등의 증언 그리고 이쪽 분야에 대한 연구 등으로 동양에서 사상적 종교적으로 접근되었던 문제가 서양에서는 심리 과학적 실증적으로 접근되고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공식적으로 종교인은 아니지만 윤회설을 개인적으로 이미 굳게 믿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으로 윤회의 비밀을 읽어 본 후 여러 생각이 오고 가는 중에 에드가 케이시의 리딩이 말하는 윤회설과 불교의 윤회설과 비교해보게 되었고 얘기를 조금 바꾸어서 윤회설을 주장하는 불교와 윤회설을 부정하는 종교인 기독교를 두고 함께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종교란 본질적으로 무엇인가?
나아가 종교가 우리의 삶과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에 이어 그보다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주려 하는가?
라는 데까지 생각이 이르렀다.
불교를 믿는 사람이나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나 종교의 본질에서 보면 자신을 영적으로 구원해 나가고자 하는 데는 별 차이가 없다고 본다.
그 방법으로 불교에서는 궁극적으로 깨달음을 성취하여 성불을 하는 게 목적이지만 모두가 당장 다 성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인연 따라왔다가 인연 따라가는 것이라고 하여 누생(累生 )의 그 업에 따라 인과(因果) 관계로 한 생이 얽히어 살다 간다고 했다.
그러면 고해(苦海)라 할 수 있는 세상에서 거듭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인생으로써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보다 나은 내생을 위해서는 우선 타를 위해 공덕을 쌓아야 하고 마음의 심성을 맑게 하여 자비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용서하라는 것이다.
나쁜 인연을 짓지 말고 만약 자기에게 주어진 나쁜 일이라도 흔쾌히 받아들이고 좋은 일이면 겸손하게 생각하며 더욱 좋은 일을 하도록 노력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쁜 운명이라면 이는 나의 지은 죄로 업에 대한 대가라 생각하고 참회하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이겨야 하며 십악 도에 들지 말고 8정 도로 나가면 안심입명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좋은 내생을 가질 복덕을 쌓고 또는 왕생극락할 수 있다는 사상이다.
여기에서의 극락은 오직 유심상의 세계라고 보아야 한다.
마음먹기에 따라 내가 사는 이 세상과 내가 서있는 현재의 이 자리가 그대로 모두 극락이라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것은 세상은 모두 조물주 하나님 즉 신의 뜻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착하고 좋은 일을 하는 삶을 원하심으로 하나님 뜻대로 살라 하는 것이다.
모두는 결과적으로 자기가 살아간 대로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것이므로 좋은 일은 신에게 감사하고 더욱 착한 사람이 되어 신으로 하여금 즐겁게 하고 자신은 더 완전한 구원으로 가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나쁜 일은 자기의 나쁜 마음이나 교만에 의한 것을 교정 키 위하여 사랑의 의미를 담거나 또는 보다 나은 어떤 운명의 개척에 대한 신이 준 시련으로 믿고 오히려 겸허하고 기꺼이 받아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의 뜻에 따라 착한 일을 하고 모든 이웃을 사랑하면 구원받을 수 있고 하나님이 가르침에 충실하여 죄를 회계하고 기도하며 사랑이 충만한 삶을 살면 천당으로 간다고 한다.
천당으로 간다는 것은 영혼이 구원되어 즐겁고 좋은 곳에 살 수 있다는 생각과 같을 수 있기에 기본적으로 불교의 극락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아야 한다.
비록 오늘날의 기독교 신자들이 천당을 유심상의 세계로 보지 않는다 해도 상징성은 그렇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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