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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회설_4
    아버지 2020. 10. 6.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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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드가 케이시의 리딩에서는 윤회는 대령에서 분리된 어떤 타락한 영혼들이 수없는 여러 생을 걸치는 중 혹은 내용적으로 점점 퇴화하는 경우보다는 영혼의 진화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말한다.

     

    결국은 착하고 현명한 고급 영혼이 되어가는 여정으로 윤회가 이루어짐을 말했다.

     

    이것을 기독교 사상과 결부시켜보거나 불교 교리와 비교해 보아도 기독교의 윤회 부정 말고는 크게 배치되지 않는다.

     

    기독교에서 신을 우주자연섭리의 기초 원리로 본다면 이것은 불교의 자성과 같은 것이고 즉 여래의 경지와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표현방법이나 그것을 그려내는 방법은 어떻게 다르던지 간에 말이다.

     

    이와 동시에 에드가 케이시의 리딩에서 말하는 대령과도 동일하다.

     

    불교가 말하는 청정무구한 자성에서 미망이 일어나 무명이 생기고 윤회의 길에 들어섰다는 것과 기독교에서 신이라는 원인에서 인간이 창조되고 상징적인 얘기지만 아담과 하와가 신의 뜻을 거부하고 욕심이 생겨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이것으로 말미암아 원죄를 지었다는 것은 어딘가 닮은 데가 있다.

     

    물론 비록 신의 원인도 분명한 설명이 없고 불교에 무시겁(無時劫)을 넘어서 무시무종(無始無終)의 공간으로부터 얘기가 전개되는 것을 유한한 기독교 성경의 인간 창조 시간에 비교한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억지라 할 수도 있겠지만 역시 상징성만은 그렇다는 말이다.

     

    지나 서미나라 박사가 에드가 케이시의 리딩을 연구하여 쓴 윤회의 비밀에서 주장하는 영혼의 진화라는 설명도 고급 영혼이 된 영혼의 종착역이 어디냐 하는 문제로 대령으로 표현되는데 이것도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름으로 인간의 시작인 아담과 하와가 배반한 원죄 즉 불교식으로 말한다면 미망을 벗고 믿음을 쌓아 좋은 일을 많이 함으로 영혼의 구원을 얻어 천국에 입문하거나 최후심판에 구원된다는 것과 불교에서 점점 노력하여 한생 한생을 진보 발전시켜 성불할 수 있는 근기를 쌓아 마침내 해탈성불한다는 것과 비슷하다고 본다.

     

    여기에서 지금 전개하는 얘기들은 불교에 기복 불교를 믿는 사람들이나 기독교의 단순한 기복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언급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니고 사욕과 이기주의에 찬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에게도 나름 대로에 자신의 위안 등 소득이 있겠지만 지금 여기서는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상의 전개를 쫒아가는 중에 내가 스스로 얻어진 결론은 종교의 본질은 비슷하나 기독교적 종교 사상보다 불교의 윤회 사상 쪽을 더 신뢰하게 되었다고 할까 무게를 더 두게 되었다.

     

    그 이유가 왜인고? 하니 인간의 영혼이랄까 마음을 정화 하는데 한 단계를 더 나아가 완전 구원되는 과정에서 기독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상에 태어나게 된 이상 오직 하나님에게 복종하고 일심으로 믿는 굳은 믿음으로서만 영혼이 구원 즉 최후심판에서 구원될 수 있다는 사상은 매우 단순한 길은 길이기는 하다.

     

    다시 말해서 이것도 따지고 보면 신을 절대자로 보는 무조건적인 믿음에서 잡념을 잠재우고 정신을 모아 통일하는 것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경지 삼매의 경지를 거쳐 정신구원을 가져오는 과정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이 복잡한 학문의 깊이나 지식 그리고 상식 등으로 고단에 이를수록 수긍하기에 어려움도 있고 그 깊이는 한계가 있다고 본다.

     

    즉 근기에 따라 영혼 구제는 될지언정 자신이 바로 절대 신과 동일해 질 수는 없다는 결론에도 도달된다.

     

    그러나 불교의 선(禪)사상은 이것을 처음부터 비유나 상징성만으로 우회적인 유도가 아니고 직접적인 가르침과 방법론에 따라 구원을 유도하는 것이고 마침내 성불이라는 최후 목표를 제시하기에 이르는데 즉 기독교의 인간을 창조 지배 관장하는 신의 차원이 아닌 우주형성의 기본이 되는 대 자연섭리의 기초가 되는 신의 경지에 자신이 동일하게 합치되는 길임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불교에서 나 자신은(여기에서의 나는 육신을 지탱하는 나가 아닌 나를 이루고 있는 마음 즉 진아(眞我)를 말한다.) 본질적으로 기독교의 절대자적 신과 다를 것이 없고 부처 즉 여래와 다를 것이 없으며 우주와 나가 둘이 아닌 일체임을 말한다.

     

    단 여기에서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나 미망이 일어나 무명의 그늘이 씌워져 고해에서 윤회를 하는 것이니 이 윤회의 사슬은 깨달음 즉 성불을 이루지 않고는 육도윤회의 사나운 흐름을 뛰어넘지 못한다고 한다.

     

    수 억겁이 지나도 조금 나아졌다 잘못하면 최하까지 타락했다가 겨우 벗어난다 해도 윤회의 삶을 다시 시작하는 등으로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리하여 작게는 염불삼매나 정진 등으로 구원을 모색하기도 하나 이것은 기독교의 기도와 믿음으로 얻는 경지와 같은 것이라고 본다.

     

    불교에서의 왕생극락 운운하는 것도 이론을 비약시키지 않으면 이 범주에 속한다고 본다.

     

    불교에서는 여기에 참선이라는 특수한 고도의 정신수련에서 기본적으로 세상은 범아가 일체이며 인간 정신은 무한능력이 있어 무명을 벗기고 대정각상을 이루면 구원될 수 있음을 스스로 알고 오직 매진하여 더 갈 수 없는 아뇩다라 삼먁삼보리를 이루어 성불함으로 나 자신이 신이랄까 우주법칙에 하나로 동화됨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혼의 구원은 궁극적으로 자기가 자성을 관조하여 자신의 마음을 정화함으로서만 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된다.

     

    그리하여 영혼구제가 결론은 비슷하다 하더라도 기독교가 우주본체를 절대자로 의인화 내지 인격화 하여 타에 복종으로 타를 의지하여 자신을 구원코자 하는 흔하고 전형적인 신앙종교의 형태라면 불교는 그보다 단순 신학적인 학문이 아닌 철학과 과학의 학문적으로 구조적 법칙을 설명하고 오직 처음부터 끝까지 자의 자력으로 목표에 도달코자 하는 점이다.

     

    성철스님은 "석가모니의 위대함은 인간의 위대성을 밝힌데 있다"고 했다.

     

    또 "누구나 자기 집 마당에 무가지보가 묻혔는데 믿지 않고 게을러 캐지 않아서 쓰지 못한다" 고도했다.

     

    이 인간의 무한 잠재력을 일깨워 본질이 우주 법칙과 맞닿아 있음을 철학적 과학적 학문으로 설명하는 것이 고차원적이라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어쨌든 이 윤회의 비밀을 읽은 후에 다른 것은 몰라도 인간 윤회에 대한 믿음이 더욱 두터워진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업보와 인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연잎에 뒤덮인 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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