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8x90반응형
폐차에 감상(感傷)
나는 지금부터 10년 전 중고 트럭 한 대를 샀었다. 당시에 주행 계측기에는 7만 키로가 조금 못 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출고 4년 정도가 된 차였다. 이 트럭을 사서 지난 10년간 나는 20만 키로가 넘는 운행을 했다. 어쨌든 이 트럭은 그동안 10년간 나에게 참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함께 한 많은 추억을 갖고 있다. 함께 공사현장을 누볐고 수많은 짐을 이동하여 이득을 준 효도를 톡톡히 한 차다.
여러모로 정이 들었다. 당시 구입비에 비하면 정말 고마운 차였다. 그런데 이 차도 세월 앞에 별도리가 없어 이제는 너무 노후되어 그만 탈 수밖에 없게 되었다.
마침 올해엔 99년도 이전의 보유 차량을 교체하여 차를 사는 사람에게는 여러 세제 혜택이 있다고 해서 그만 폐차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오는 2009년 11월 20일은 보험 만기일이고 자동차 검사일인데 불과 55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그 안에 처분하려고 집 앞에 세워 두었던 차를 마지막으로 끌고 집을 나서려 한다.
늦가을을 지나 초겨울에 접어든 지금 찬바람과 함께 낙엽이 날린다. 센 바람이 휙 하고 한번 지나가면 마치 가창오리 떼의 군무를 보는 것 같다. 문 앞에 은행잎은 우수수 떨어져 나무 아래 노랗게 쌓였는가 하면 트럭의 적재함에도 내려앉아 있다.
매년 이때쯤 항상 보던 현상이었지만 오늘은 나뭇잎이 한생을 마치고 휘날 리는 서글픈 계절에 자기의 역할을 끝내려는 트럭 앞에 서니 감회가 또 다르다.
트럭이 비록 쇳덩어리인 기계에 불과 하지만 가슴에 이는 착잡한 심정은 정든 가족을 마지막 보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시동을 켜고 집 앞을 떠나며 이것이 이 차와 우리 집과의 마지막 이별임을 생각하니 내가 바로 당사자인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밀려오는 만회가 가슴을 울컥하게 한다. 형용 할 수 없는 아쉬움. 서운함. 허무함..... 등 묘한 심사다.
이 차가 폐차되면 쓸 수 있는 부품과 단순 고철로 산산이 분해되어 자동차 로의 일생을 끝낼 것이다. 이것은 마치 유정의 한 생명이 마지막을 보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느껴진다. 거기에 깊은 정이 속속들이 들었기 때문인지 마음을 다잡아 보고 고개를 흔들어 봐도 마음이 개운치 않다.
이 차를 폐차시키려 마음먹었을 때만 해도 좀 서운하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오늘의 이런 심정이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다만 자동차를 없애는 나의 서운한 마음 뿐 아니라 폐차되어야 하는 운명의 자동차에 대한 연민 같은 것이 함께 생기는 것 말이다.
비록 기계에 불과하지만 기계로서의 생명에 마지막을 향하는 길임을 알지 못한 채 아직도 자기 힘으로 움직여 정든 집을 이렇게 떠나고 있는 것이다.
유정의 물건이 아니니 이 자동차에 무슨 생각이 있으리오 만 그 자동차의 운명이 그대로 내 자신을 추체험케 하는듯한 심정인 것은 왜 일까? 이것이 단순 쇳덩어리가 아니고 항상 나를 태우고 함께 하던 물건이다 보니 꼭 단순 기계가 아닌 유정의 생물에 생명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가 보다.
불가의 말에 생자필멸(生者必滅)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을 생각할 때마다 인간의 덧없음을 절절히 생각하게 된다. 이 세상 모두는 생,주,괴,멸(生,住,壞,滅)을 하는 것이고 만남은 반드시 헤어짐을 정해 놓은 것이건만 누구나 만날 때는 그것을 생각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그 날은 언젠가 어김없이 오는 것이고 생리사별(生離死別)의 아픈 고통을 끊임없이 견디며 그렇게 역사는 흐른다. 10년 전 자동차와의 만남, 그리고 오늘의 헤어짐. 그리고는 또 다른 만남. 언젠가는 또 다른 이별............
하루에 한 번씩은 거의 어김없이 가고 왔던 이 길. 언제나 서 있던 그 자리. 이렇게 떠나면 언제 다시 올까? 그 모습 언제 다시 볼까? 한동안 허전하고 눈에 밟힐 것이다.
누구는 이러한 생각을 어처구니없다고 비웃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차를 몰고 가면서 자꾸 안타까워지는 것은 왜 일까? 내가 비정상적이어서 일까?
아니다. 이것이 인간에 선(善)한 감성의 일환이 아닐까?
정든 것들과의 어쩔 수 없는 헤어짐에 안타까움, 그것을 아쉬워하고 가슴 아파하는 것 그런 여린 마음 말이다. 이런 마음을 갖고는 큰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해도 어쩔 수 없다. 큰일도 좋고 혁명가도 좋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래도 여린 감성을 갖은 자를 더 좋아한다. 그 속에 인간의 휴머니즘과 선(善)한 마음도 함께 하기 때문이다.
목적을 갖은 결과물도 좋은 결과에는 또 다른 선(善) 일지는 모르지만 세상을 불쌍히 보는 마음, 불가의 말로 자비심이라든가 맹자의 사단설에 인(仁)의 실마리인 측은지심 같은 그런 선(善) 말이다. 바로 그러한 마음만이 인간을 사랑하고 모든 생명을 사랑하고 그러할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삶이 아닌 휴머니즘에 기초를 둔 그런 마음을 더욱 사랑한다.
폐차된 아버지의 차 반응형